2025.01.05~01.07
*5.0
한강작가님이 맨부커 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읽었던 '채식주의자'를 읽고 공감을 못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도 굳이 책을 찾아 읽지 않으려고 했는데...
2024년 12월 3일 TV속에서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는 것을 보게 됐다.
유튜브를 통해 국회 주변을 군인들이 둘러싸고, 창을 깨고 들어가는 군인들을 봤다.
군인들이 탄 차를 몸으로 막으며, 길에 누워 이동을 막으려고 했던 많은 시민들까지...
계엄 해제를 국회에서 의결하기까지 그 잠 못 들던 새벽
그리고 수사를 통해 드러나는 여러 사실들.
대통령의 직무는 정지되었지만, 나는 아무 잘못 없고, 이 모든 게 반국가세력이 주권 침탈을 하려 해서 벌어진 일이라며, 법은 나 몰라라, 국민과 끝까지 싸우겠다는 대통령
탄핵트라우마 운운하며 대통령 감싸기에 열 올리는 여당을 보면서 한강작가님이 한림원에서 했던 강연의 문구가 강하게 다가왔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그날 시민들이 국회로 달려가지 않았다면, 그날 담장을 넘은 야당 국회의원들이 없었다면...
동호, 정대, 정미, 은숙, 선주, 진수, 동호의 엄마...
1980년 5월 18일부터 열흘간 있었던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상황과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몇십 년이 지난 후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로 이 책은 채워져 있다. 각 장마다 한강 작가는 작가 특유의 느릿하고 잔잔한 목소리로 나를 그 현장으로 데리고 가는 것 같았다. 1장이 끝나면 다시 문 밖으로 데리고 나와 다음 장의 새로운 문으로 나를 데려가는 듯한...
처참하게 죽어간 사람들, 군인들이 했던 끔찍한 고문, 동호 엄마의 애달픔이 그대로 느껴지는 문장들을 읽으며 나는 몇 번이나 깊은 한숨을 쉬어야 했다.
그렇게 단 몇 시간 만에 끝나는 계엄이 어디 있냐며, 오죽했으면 했겠냐는 대통령과 그 무리들...
어렸을 적 함께 살았던 막내 외삼촌은 강성 운동권 학생이었고, 외삼촌이 집에 들어오면 삼촌의 하루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최루탄 냄새로 쉬지 않고 재채기를 했던 기억이 있다. 외삼촌의 옥바라지를 했던 기억이 힘들어서인지, 내가 대학에 갔을 때 혹시나 학생운동에 빠지지는 않을지 걱정되어 우리 엄마는 내가 사물놀이 동아리에도 가입하지 못하게 했더랬다. 하지만 내가 입학한 시기는 기껏해야 등록금 투쟁정도 하던 시기였으니... 걱정을 사서 하셨던 우리 엄마...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단순히 법전 속에 있는 문장들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지난 시간 무고한 사람들의 피와 땀과 눈물로 만들어진 것임을 제발 알았으면 좋겠다.
<2024년 스웨덴 한림원에서 있었던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韓康) 작가의 강연 발췌>
1980년 1월 가족과 함께 광주를 떠난 뒤 4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그곳에서 학살이 벌어졌을 때 나는 아홉 살이었다.
이후 몇 해가 흘러 서가에 거꾸로 꽂힌 ‘광주 사진첩’을 우연히 발견해 어른들 몰래 읽었을 때는 열두 살이었다. 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에 저항하다 곤봉과 총검, 총격에 살해된 시민들과 학생들의 사진들이 실려 있는, 당시 정권의 철저한 언론 통제로 인해 왜곡된 진실을 증거 하기 위해 유족들과 생존자들이 비밀리에 제작해 유통한 책이었다. 어렸던 나는 그 사진들의 정치적 의미를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그 훼손된 얼굴들은 오직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으로 내 안에 새겨졌다. 인간은 인간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가,
나는 생각했다. 동시에 다른 의문도 있었다. 같은 책에 실려 있는, 총상자들에게 피를 나눠주기 위해 대학병원 앞에서 끝없이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의 사진이었다. 인간은 인간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가.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두 질문이 충돌해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되었다. 그러니까 2012년 봄, ‘삶을 껴안는 눈부시게 밝은 소설’을 쓰려고 애쓰던 어느 날, 한번도 풀린 적 없는 그 의문들을 내 안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이었다. 오래전에 이미 나는 인간에 대한 근원적 신뢰를 잃었다. 그런데 어떻게 세계를 껴안을 수 있겠는가? 그 불가능한 수수께끼를 대면하지 않으면 앞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을, 오직 글쓰기로만 그 의문들을 꿰뚫고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그 후 1년 가까이 새로 쓸 소설에 대한 스케치를 하며, 1980년 5월 광주가 하나의 겹으로 들어가는 소설을 상상했다.
인간은 어떻게 이토록 폭력적인가? 동시에 인간은 어떻게 그토록 압도적인 폭력의 반대편에 설 수 있는가?
그러다 망월동 묘지에 찾아간 것은 같은 해 12월, 눈이 몹시 내리고 난 다음날 오후였다. 어두워질 무렵 심장에 손을 얹고 얼어붙은 묘지를 걸어 나오면서 생각했다. 광주가 하나의 겹이 되는 소설이 아니라, 정면으로 광주를 다루는 소설을 쓰겠다고. 9백여 명의 증언을 모은 책을 구해, 약 한 달에 걸쳐 매일 아홉 시간씩 읽어 완독했다. 이후 광주뿐 아니라 국가폭력의 다른 사례들을 다룬 자료들을, 장소와 시간대를 넓혀 인간들이 전 세계에 걸쳐, 긴 역사에 걸쳐 반복해 온 학살들에 대한 책들을 읽었다. 그렇게 자료 작업을 하던 시기에 내가 떠올리곤 했던 두 개의 질문이 있다. 이십 대 중 반에 일기장을 바꿀 때마다 맨 앞페이지에 적었던 문장들이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자료를 읽을수록 이 질문들은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는 듯했다. 인간성의 가장 어두운 부분들을 지속적으로 접하며, 오래전에 금이 갔다고 생각했던 인간성에 대한 믿음이 마저 깨어지고 부서지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쓰는 일을 더 이상 진척할 수 없겠다고 거의 체념했을 때 한 젊은 야학 교사의 일기를 읽었다. 1980년 오월 당시 광주에서 군인들이 잠시 물러간 뒤 열흘 동안 이루어졌던 시민자치의 절대공동체에 참여했으며, 군인들이 되돌아오기로 예고된 새벽까지 도청 옆 YWCA에 남아 있다 살해되었던, 수줍은 성격의 조용한 사람이었다는 박용준은 마지막 밤에 이렇게 썼다. “하느님, 왜 저에 게는 양심이 있어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그 문장들을 읽은 순간, 이 소설이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벼락처럼 알게 되었다. 두 개의 질문을 이렇게 거꾸로 뒤집어야 한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이후 이 소설을 쓰는 동안, 실제로 과거가 현재를 돕고 있다고, 죽은 자들이 산 자를 구하고 있다고 느낀 순간들이 있었다. 이따금 그 묘지에 다시 찾아갔는데, 이상하게도 갈 때마다 날이 맑았다.
눈을 감으면 태양의 주황빛이 눈꺼풀 안쪽에 가득 찼다. 그것이 생명의 빛이라고 나는 느꼈다. 말할 수 없이 따스한 빛과 공기가 내 몸을 에워싸고 있다고. 열두 살에 그 사진첩을 본 이후 품게 된 나의 의문들은 이런 것이었다.
인간은 어떻게 이토록 폭력적인가? 동시에 인간은 어떻게 그토록 압도적인 폭력의 반대편에 설 수 있는 가? 우리가 인간이라는 종에 속한다는 사실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의 참혹과 존엄 사이에서, 두 벼랑 사이를 잇는 불가능한 허공의 길을 건너려면 죽은 자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어린 동호가 어머니의 손을 힘껏 끌고 햇빛이 비치는 쪽으로 걸었던 것처럼. 당연하게도 나는 그 망자들에게, 유족들과 생존자들에게 일어난 어떤 일도 돌이킬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은 내 몸의 감각과 감정과 생명을 빌려드리는 것뿐이었다. 소설의 처음과 끝에 촛불을 밝히고 싶었기에, 당시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식을 치르는 곳이었던 상무관에서 첫 장면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열다섯 살의 소년 동호가 시신들 위로 흰 천을 덮고 촛불을 밝힌다.
사랑에서 고통이 생겨나고, 어떤 고통은 사랑의 증거인 것일까?
파르스름한 심장 같은 불꽃의 중심을 응시한다. 이 소설의 한국어 제목은 <소년이 온다>이다. ‘온다’는 ‘오다’라는 동사의 현재형이다. 너라고, 혹은 당신이라고 2인칭으로 불리는 순간 희끄무레한 어둠 속에서 깨어난 소년이 혼의 걸음걸이로 현재를 향해 다가온다. 점점 더 가까이 걸어와 현재가 된다. 인간의 잔혹성과 존엄함이 극한의 형태로 동시에 존재했던 시공간을 광주라고 부를 때, 광주는 더 이상한 도시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가 된다는 것을 나는 이 책을 쓰는 동안 알게 되었다. 시간과 공간을 건너 계속해서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현재형이라는 것을.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그렇게 <소년이 온다>를 완성해 마침내 출간한 2014년 봄,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독자들이 이 소설을 읽으며 느꼈다고 고백해 온 고통이었다. 내가 이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느낀 고통과, 그 책을 읽은 사람들이 느꼈다고 말하는 고통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 나는 생각해야만 했다. 그 고통의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인간성을 믿고자 하기에, 그 믿음이 흔들릴 때 자신이 파괴되는 것을 느끼는 것일까? 우리는 인간을 사랑하고자 하기에, 그 사랑이 부서질 때 고통을 느끼는 것일까? 사랑에서 고통이 생겨나고, 어떤 고통은 사랑의 증거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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